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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John Wesley)목사님에 의한 연합감리교회의 태동   

요한 웨슬리는 영국에서 지금부터 300년전인 1703년 6월 28일에 태어났습니다. 웨슬리가 태어난 영국은 당시 국교도 즉 지금의 성공회와 청교도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뒤숭숭하였고 게다가 산업혁명이 끼친 사회혼란등으로 술취함, 싸움질, 도박,도적질, 자살등이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게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신앙심이 많았던 어머니 수잔나 부인에게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는 1720년 초여름 챠터하우스 학교를 마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도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때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있던 동생 찰스웨슬리는 신앙이 뜨거워져 매주일 한번씩 몇몇 친구들을 모아 놓고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동생의 요청으로 요한 웨슬리가 이 모임을 주관하게 되었고 날로 성장해 갔습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학교안에 쫙 퍼져 나갔습니다. "우리 대학교안에 불이 붙었다, 성경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그들이야말로 메도디스트들이다" 메도디스트(methodist)는 감리교도라는 뜻으로 요한 웨슬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여 오늘의 감리교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모임은 '거룩한 클럽'이라 불리웠는데 한결같이 기도와 성경공부 그리고 구제에 헌신하였습니다. 

얼마후 버튼박사의 추천으로 요한 웨슬리는 동생과 '거룩한 클럽'회원인 벤자민 잉헴과 함께 1735년 10월 18일 미국을 향하여 그레이브샌드 항구를 출발하였습니다. 이때 요한 웨슬리는 일생에 또 한번 큰 변화를 겪게 되는 사건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시몬즈 호가 넓은 대서양을 가로질러 가던 어느날 이었습니다. "앗, 태풍이닷!!" "쏴-- 꽈르릉 꽈당,꽝" 캄캄한 밤, 순식간에 배는 하늘이 터진 듯한 소낙비와 무서운 파도속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거센 파도소리를 뚫고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젠 상어밥이 되는 구나" 웨슬리도 어느새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어디선가 은은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여왔습니다. 이 찬송을 듣는 웨슬리는 너무나 놀랐고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모라비안 성도들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웨슬리는 자신이 삶속에서 주님의 구원을 믿지 못함을 깨닫고 후에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4개월만에 마침내 미국대륙에 도착하여 목회를 시작하였지만 한 부도덕한 여인의 모함을 계기로 미국에서의 사역에 종지부를 찍고 2년만에 영국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는 이 모든 사건을 통해 아주 겸손하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자가 되었습니다그후 그는 모라비안교의 지도자 피터볼리로부터 도움을 받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이후 1738년 그는 '올더스게이트사건'이라 불리는 가슴이 타오르는 뜨거운 거듭남의 체험을 하고 이때부터 무서운 열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맨 처음 설교는 옥스퍼드대학생들 앞에서 하였습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설교내용의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은 가슴을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칼날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박혀들고 많은 나무를 태우는 뜨거운 불길과 같았습니다. 

요한 웨슬리 그는 외소하였지만 그처럼 작은 몸 안에 세계를 흔드는 힘이 들어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전도하기 위하여 50년동안 말을 타고서 지구 10바퀴이상되는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그 틈에 2백권이 훨씬 넘는 책을 펴내었습니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60년 동안 한번도 걸러본적이 없이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설교하였고 동생과 만든 수많은 찬송가중에 1778년에는 좋은 것만 뽑아 525곡의 커다란 찬송가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성경이 만든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요한 웨슬리는 성경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80세가 되었을 무렵 그가 전도를 다닌 곳마다 어느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86세의 나이에 자신을 핍박했던 아일랜드 콘웰에서 2만5천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말년일지라도 자신에게 남은 한순간 한순간을 쓸모없이 살아가지 않고자 촌음을 아껴서 복음 전파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쇠약하여 죽기 5일전까지도 그는 32km 떨어진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89세의 나이로 죽을때 두 개의 숟가락과 하나의 찻 주전자,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밖에 없을 정도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의 임종을 안타까와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웨슬리는 평안한 가운데 멀고 먼 인생의 길을 다 마치고 천국의 영광의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웨슬리가 이땅을 떠날 당시, 영국에는 294명의 설교자와 71668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선교부에는 19명의 선교사와 5300명의 회원이 있었고 미국에는 198명의 설교자와 43265명의 회원을 가질만큼 그의 인생은 큰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연합감리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감리교회의 시작   
 
한국에 감리교회가 공식적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일본에서 일하던 미국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 맥클레이 박사의 내한이었습니다. 맥클레이 목사는 당시 고종폐하에게 드리는 공한을 가져 왔는데 이 공한은 기독교 선교를 탄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주한 미국 공사인 푸트와 외무협판인 김옥균을 통해 봉정된 이 서신은 고종에게 전달되었고 7월 3일에 교육과 의료사업에 대한 허락을 받아내었습니다.맥클레이 목사는 1884년 6월 23일 인천에 도착하여 다음 날인 24일 서울에 들어와 공사관에 체류하여 고종으로부터 윤허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맥클레이 목사는 이 사실을 미국 뉴욕에 있는 선교본부에 보고하였습니다. 

한국에서 교육선교사업을 시작하자고 주장하던 가우쳐 박사는 그 당시 물심양면으로 원조를 하여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인천(당시 제물포)에 봄비를 맞으며 아펜젤러 목사부부와 스크랜톤 의사 부부, 그리고 동행한 스크랜톤 의사의 자당 스크랜톤 부인이 미 감리교회를 대표하여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로 도착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1895년 8월 17일 아펜젤러선교사를 회장으로 정동 예배처에서 모여서 정동병원과 아펜젤러의 배재학당(1885. 8. 3일) 또한 정동교회의 예배를 축하하였습니다. 이 것이 한국 감리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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